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2 군사반란 (문단 편집) == [[5.16 군사정변]]과의 비교 == 한편, 12·12 군사반란은 이전의 [[5.16 군사정변]]과는 성격이 매우 판이하다. 5.16 군사정변이 바로 청와대까지 들이밀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데 비해[* 이것이 약간 애매한데 2공화국은 내각책임제로서 비록 대통령이 윤보선이었지만 총리였던 장면이 정부 수반으로 정권을 운용하는 체계였다.(지금의 독일을 생각하면 쉽다.) 5.16 정변이 일어나자 정부 수반인 장면은 도주하였지만 대통령 윤보선과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활동하는데 특별한 제재가 없었다.(5.16 기록을 보면 윤보선은 미국 대사, 미군 사령관과 접견하고 그들로부터 정변 진압을 요구 받지만 거절한다. 또한 장도영은 5.16 이후 장면 내각의 업무를 대행할 군사혁명위원회(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의 의장으로 추대 받고, 대통령 윤보선으로부터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다.] 12·12 군사반란은 군부를 장악했을 뿐, 당시 국민들이나 야당의 분위기 때문에 눈치 보느라 '정변'을 일으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사태라는 애매한 이름이 붙었던 것도 이런 혼란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0.26 관련 사건 조사 차원에서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헌병까지 불러서 통제(중정은 [[김재규|수장]]이 대통령 암살범이라는 약점이 잡혔고, 계엄령 하에서 경찰은 상식적으로 계엄사가 통제하여야 한다. 여기 당시에는 군검찰이 별도로 없었고, 사건을 보안사가 조사하고 있었으며 또한 헌병은 몇몇 제외하고는 하나회 통제 하에 있는 곳이었다.)한다고 할 수 있지만, 12·12 이전에 이미 정부 각 부서의 차관들을 불렀다는 내용을 생각해보면 이미 정권을 장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반란의 성공이 곧바로 신군부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엄연히 최규하 대통령과 내각이 그들 위에 존재했으며, 이후로도 야당과 대학생 등 반대 세력의 저항은 거세어지는 등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때문에 신군부 측에서는 또 한 번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듬해 1980년에 벌어진 [[5.17 내란|5.17 군사 쿠데타]]였으며 이때 비로소 신군부의 정권 장악이 완성된다.[* 이때 전두환은 전국적인 계엄을 내리도록 국무회의 의결을 종용했는데, 토론은커녕 확인도 없이 '8분 만에' 의결 처리되었다.] 이로써 전두환은 대통령 바로 밑의 '사실상' 계엄사령관 같은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자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 [[이희성]] [[대장(계급)|대장]]이었으나, 그는 어디까지 [[바지사장]]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끔찍한 비극의 원인이 된 사건이다. 이렇게 쿠데타 치고는 정권 장악까지 걸린 긴 시간 때문에 전두환의 정권 장악은 5개월짜리[* 대통령 취임까지 따지면 10개월]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이상한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 1화에서도 나레이터가 이를 언급한다.] 물론 실제로 가장 긴 쿠데타라는 것은 아니다. [[내전]]을 포함한 양상의 다른 쿠데타들도 많으므로.[* 단, 10.26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계엄령이 발령되어 있었는데, 계엄 상황 속에서 이를 관리해야 할 육본과 주요 부대장들이 반란에 의한 교체가 된 상황 자체는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고 봐야 한다.(국회가 개원하여 계엄을 해제하여 상황을 종료할 방책이 있다는 점에서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국회 개원을 막고자 한다면 못 막을 것이 없다. 그리고 이미 충정 훈련이라고 해서 각 부대에 시위 진압 훈련을 시행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만 않았다.)] 12·12 이후 5.17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정권 장악은 크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차근차근 진행되어 나갔고 이런 과정에서 여러 언론들이 [[용비어천가|전비어천가]]로 [[땡전뉴스|그들을 찬양하는 뉴스로 장식하기도 했다.]] 한편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전두환과 휘하 부하들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나간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알아챈 사람들은 많았다.[* 실제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됐던 구호가 바로 '전두환 물러가라'였고 한편으로는 '김대중 석방'도 있었다.] 이 때문에 최규하는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국민들에게 [[허수아비]] 대통령 운운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박정희는 직접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서 대권을 잡은 반면,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정권 찬탈'이라는 오명을 벗기가 어려운 점이 있고, 5.16은 그나마 일부 집단으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이 있다는 식으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12·12는 그런 것 일절없이 비난 받는다는 점도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